[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 시절이 수상해도 봄은 오더라, 산수유꽃 보러 가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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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제이진 정기영 기자] 예년의 봄과 달랐다. 춥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흔적도 없이 꼬리를 들고 도망칠 것 같더니 기어이 사고를 쳤다. 대형 사고다. 대통령을 비롯해 나라가 적극적으로 방역에 힘쓰는 동안 주춤할 것 같더니 다시 또 집단 확진과 격리 등 방역이 더더욱 세졌다. 걸으면서 만나는 우리나라는 참 넓은데 뉴스를 통해 보는 우리나라는 좁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함이 맞는 요즈음이지만 돌아다니던 사람이 방구석 객창감으로 집안에만 있으면 발병도 나고 맘 병도 난다. 어디를 걸어야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년 이 맘 때 나는 지리산 둘레길을 혼자 20여 일간 걸었었다. 걸으면서 꽃이 피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벚꽃까지 꽃 마중을 했으니 이쯤 되면 지리산 둘레길 만한 곳도 없을 성 싶었다.


새벽, 나를 포함한 네 명의 길벗이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전남 남원의 주천마을이다.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과 끝인 이곳에서 우리는 역방향으로 걸어 봄의 전령인 산수유 꽃이 핀 산동으로 넘어갈 계획을 했다. 공정여행의 일환으로 마을의 백반집에서 푸짐한 한상을 먹은 뒤 마을 속으로 들어섰다. 주말의 아침이어서인지 조용하지만 마을은 소리 없이 봄을 시작하고 있었다. 산수유 꽃 병풍이 쳐진 밭에서 어르신이 밭을 갈고 계셨고, 걷는 곳곳마다 산수유나무가 보였다. 일행 중 누군가 생강나무 꽃과 산수유 꽃이 구분이 안 된다고 하기에 보숭보숭한 털무더기와 쭈삣한 꽃송이의 차이를 알려주었더니 이제는 제대로 알겠단다. 얼마 걷지 않아 다들 덥다며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는다.


지리산 둘레길은 이번 큰일로 일부 구간을 폐쇄했다. 산자락과 마을을 이어가는 둘레길에서 마을 어르신들이 운영하시는 민박집과 마을 화장실 등 마을 공중 시설은 문을 닫았다. 젊은 사람들보다 어르신들이 많은 탓에 감염의 위험이 높아질까 싶은 탓이다. 마을 어르신이 멀리서 보이면 각자의 보조 백에 든 마스크를 꺼내어 쓰는 웃픈 현실. 일행들은 마을을 통과할 때 유난히 조심스러워 말 한 마디도 아꼈다. 하기는 길에서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묵언 수행처럼 길이 내게 전해주는 것은 길과 나와의 교감과 소통인 전부인 것이 걷기인 것을. 구태여 말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숲에서는 마스크 속에 찬 숨을 내뱉듯 큰 숨을 들이 쉬고, 내쉬며 맑은 공기로 폐를 채웠다.


주천마을을 벗어나면 이내 용궁 마을이다. 용궁마을은 해발 1050m의 영제봉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바다 속 용궁의 모습과 같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란다. 위에서 내려다 볼 수는 없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물길을 따라 자라는 산수유 군락지를 볼 수 있었다. 이곳 용궁마을의 산수유는 구례산동의 산수유 중 가장 으뜸으로 칠 정도로 그 색이 진하고 꽃이 큰데 숨겨진 산수유 꽃 명소다. 용궁마을을 뒤로하고 장안제를 지나면 이제부터는 한동안 산길과 임도길이다. 무넘이 고개로 넘어가는 길은 작년과는 다르게 돌계단을 설치해 정비했는데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무 계단이 아닌 돌이어서일까. 해발 300m 남짓의 마을 뒷산이지만 지리산 자락의 산이어서인지 숲은 생각보다 골이 깊다.


산길을 내려오면 어느 샌가 길이 뚝 끊기며 고속으로 오가는 차량의 소리가 귓가를 찢어놓듯 시끄럽다. 느릿하게 우회하던 19번 국도가 밤재 터널이 생긴 이후 일직선상으로 놓인 탓이다. 이쯤에서 길은 지리산 유스캠프를 둘러간다. 캠프장 안으로는 진입하지 않고, 언저리에서 임도를 따라 밤재까지 오른다. 임도는 특성상 가파르지 않고 넓은 길을 그대로 마주한다. 한 구비 넘으면 다시 한 구비, 동행들은 뒤에 쳐져서 가는 나를 기다리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따로 또 같이’를 하는 중이다. 슬슬 지루할 때쯤이면 깔딱 임도다. 위에서부터 사람들 소리가 나더니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만났다. 걷는 내내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길을 걸었던 4명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들의 소란스러움이 반가울 정도로 길은 조용했다.

깔딱 임도를 오른 후 다시 산자락을 몇 번 도니 드디어 밤재에 올랐다. 그다지 힘들지 않게 도착한 해발 500m의 밤재는 지리산 서북능선 맛집이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고리봉, 묘봉치, 세걸산 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작년에는 이곳에서 만복대에 하얗게 핀 설경을 보았었지만 올해는 민둥산이다. 겨울이 춥지 않았던 탓이다. 점심으로 가져온 행동식을 먹으려고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바람이 세차다. 그래도 햇살은 따뜻해 햇살 아래에서 누리는 여유가 좋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이렇게 좋다는 햇살을 얼마 후면 덥다고 피해다니며 덥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얼마나 쉬었을까. 잘 쉬었으니 목적했던 마을로 내려가는 길도 역시나 임도로 편하게 내려선다.

밤재에서 내려와 오늘 숙영지로 예정한 계척마을로 가는 길에는 편백나무 숲이 자리한다. 수령 30년 이상의 편백나무 수 만 그루를 구례군에서 조성한 곳으로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과는 느낌이 다르다. 축령산의 편백나무가 예쁘게 화장한 숲이라면 이곳의 숲은 맨얼굴이다. 빡빡한 나무 숲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깊은 숲에 있는 듯 하지만 음침하지 않다. 가꾼 듯 가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숲은 쉴 수 있는 공간도, 여러 곳의 산책로가 있지만 찾는 이가 없는지 살짝 낡은 모습이다. 조붓한 길을 따라 살짝 오르내리면 이내 얕은 계곡과 만난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계곡을 만난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흐르는 물에 손을 닦았다. 더위가 살짝 가셨다. 여름이었다면 발이 시원하게 담갔을 테지만 아직 일렀다.

목적했던 계척 마을에서 우리는 마을 언저리 체육공원을 숙영지로 정했다. 마을 어르신께 쓰레기를 꼭 가져가라는 당부를 들으면서 허락을 받고는 공원 아래 주차장에 각자의 조그만 집을 지었다. 오후의 햇살이 남아 있으니 집에서 쉬기보다 마을로 꽃구경을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숙영지에서 1km 남짓한 거리,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실개천 주변으로 산수유 꽃이 만발했다. 걸음을 멈췄다. 역광의 햇살에 반짝거리는 산수유 꽃은 햇살도 노랗게 만들 정도로 노랑노랑한 세상을 보여주었다. 1천년의 세월을 안은 할머니 산수유나무는 여전히 그 가지가 넓고 꽃이 많이 피었다. 시절은 수상한데도 꽃은 여전했다. 저녁이 되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텐트 밖으로 바람이 세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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