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와 ‘모호’ 속에 깃든 보석

- 여행을 탐하다 9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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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이 스르르 당신의 고운 이마를 지나쳐 얼굴 위로 드리워지던 순간처럼,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갑니다. 약간의 술이 들어간 당신의 볼처럼 하늘은 발그레 물들고, 투명하던 공기는 점점 푸르스름해집니다. 이제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의 윤곽은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겠지요. 프랑스에서는 이런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더군요. 어둑어둑한 들판과 언덕을 지나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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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을 닮은 달, 9월입니다. 9월은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는 애매(曖昧)와 ‘흐리어 똑똑하지 못하다’는 모호(模糊)의 사전적 의미처럼 ‘애매모호’한 시절이죠. 새벽 찬바람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지만, 살갗엔 여전히 뜨거운 여름의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를 지나온 팔과 다리는 멜라닌 색소로 인해 검붉게 물든, 그대로입니다. 달력을 확인하지 않으면 지금이 여름인지, 가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날들. 그래서 여름을 사랑하는 이들은 달아나는 여름을 붙잡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가을을 사랑하는 이들은 서둘러 낙엽의 냄새를 찾기 위해 킁킁대며 여행을 떠납니다. 9월의 당신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난 9월이면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얼마 전 <비긴 어게인>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때는 스타 프로듀서였지만 해고를 당한 댄(마크 러팔로)은 무작정 들어선 뮤직바에서 순수한 영혼을 가진 싱어송라이터(키이라 나이틀리)를 발견하지요. 그래요, 우연한 만남이었죠. 그처럼 나도 무작정 접어든 길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연이란, ‘애매’와 ‘모호’ 속에 깃든 기적 같은 게 아닐까요? 되돌아보면 내게 황홀함을 안겨준 풍경과 길들은 늘 ‘애매’와 ‘모호’ 속에 기댄 채 떠난 길에서의 마주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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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종종 여행길에서 만나는 풍경이나 길들이 이성처럼 느껴지고, 그 만남들이 연애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참, 요즘은 연애 보다는 결혼정보회사 문을 두드려 배우자를 찾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여행에서도 그런 회사가 존재하고 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여행사의 문(웹사이트)을 두드린 후 나의 조건과 여행지의 조건(상대의 능력)을 확인한 후 여행지와 만나게 되니까요. 결혼정보회사가 맺어주는 이성처럼 여행사 패키지상품도 안전하고 표준화되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죠. 그러나 처음부터 결혼정보회사를 찾고 싶은 사람도 있나요? 모두가 꿈꾸는 로망은 우연히 나의 이상형을 만나 황홀한 사랑을 하는 거잖아요. 여행에서 최고의 로망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애매’와 ‘모호’ 속에 깃든 인연을 믿고 떠난 길에서 황홀한 풍경을 우연히 만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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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시리즈>라고 불리는 영화가 있지요. 가장 최근에 나온 편은 그리스의 아름다운 해변마을 카르다밀리를 배경으로 한 <비포 미드나잇>이죠. 소설가 남편과 환경운동가 출신의 아내의 맛깔스러운 수다가 내내 이어지는 영화. 아름다운 지중해, 색색의 빌라, 올리브 나무가 서 있는 언덕과 골목을 걸으며 수다쟁이 부부는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주죠. 느닷없이 영화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이 아름다운 부부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를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죠. <비포 선라이즈>

 

프랑스 여대생 셀린느(줄리 델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던 중 독일인 부부의 말다툼 소리를 피해 뒷좌석으로 옮겼다가 미국인 청년 제시(에단 호크)를 만납니다. 제시는 유학 온 여친을 만나기 위해 유럽에 왔다가 실연을 당하고, 다음날 출발하는 미국행 비행기를 오르기 위해 비엔나로 가던 중이었죠.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나누던 중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기차는 어느덧 비엔나 역에 도착하고, 내리려던 제시가 문득 묻습니다. 같이 내리지 않겠냐고. 셀린느가 낯선 청년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비포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느닷없는 동행으로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세월 동안의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18년 후 중년의 셀린느가 제시에게 묻습니다. 다시 열차에서 봐도 말을 걸어오겠느냐고. 그녀의 질문에 제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연하지!” 맞아요. 당연한 일이죠. ‘애매’와 ‘모호’ 속에 깃든 보석을 발견하는 순간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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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황홀한 감흥을 주는 풍경을 만나는 것도 운명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운명은 늘 우리 보다 먼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9월의 밤하늘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올 가을엔 어디로 떠날까, 물음표를 던지는 당신. 그거 아세요? 사람과 사람이 그리워하듯이, 길도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어떤 고장, 어떤 풍경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오늘 당신이 올려다 본 밤하늘의 별빛은 당신을 기다리던 길이 보낸 그리움의 신호인지도 모릅니다. 반짝….반짝……. 그리고 어떤 길은 종종 꿈을 꾸기도 한답니다. 당신이 꿈속에서 만난 길들은, 그 길이 당신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지요.

 

9월에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떠나세요. ‘애매’와 ‘모호’ 속에 깃든 보석 같은 순간이 당신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행을 탐하다 9월호 –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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